언더우드 기념사업회 - 선교보고서 편집항목 (방글라데시 장순호 선교사 1984.4-2015.9)
언더우드기념사업회- 선교보고서 편집항목 방글라데시 장순호선교사 (1984.4-2015.9) 1. 개요 (1) 인적사항 1) 출생 : 1955년 10월 1일 충남 예산 삽교감리교회 목사관에서 출생. 2) 가족 : 처 ( 민은주, 간호사), 자녀 2남 1녀 (장남 장대식, 목사 / 차남 장영식, 교사/ 딸 : 장혜선, 대학생). 3) 주요연혁 : - 1984년 4월 방글라데시 선교사 파송. - 1988년 5월 초교파 전문인 선교기구 (사) 한국방글라데시 개발협회(KDAB) 설립. - 한국기독교 선교대상, 언더우드 선교상 수상. (2) 선교지역 개요(인터넷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일반적인 내용이 아니라, 선교사님께서 증인으로 살아오신 지역의 생생한 현장의 정보-언어, 문화, 종교, 사람, 지역 주민의 삶의 양식 등-를 소개해 주 십시오.) 1) 언어 세계 4대 언어가운데 하나인 벵골어는 한글 구조와 매우 비슷하여 읽고 쓰기 쉽다. 이 아름다운 언 어에 대한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사랑은 남다르다. 언어와 종족 및 역사와 문화적 배경이 서로 다른 동·서 지역이 한 나라로 독립되고, 서파키스탄에 의한 차별정책이 심했었다. 동파키스탄도 서파키 스탄의 언어인 우르두어를 사용하여야 한다는 것에 대항한“벵골어 운동”은 약 9개월 동안 3백만 명의 사상자를 내며 지켜냈고 1913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타고르와 눌이슬람 등의 시성들과 수 많은 문학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2) 문화 방글라데시의 열악한 자연환경, 만성적 가난과 힘들었던 역사를 경험하며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 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이 전통적으로 믿어 온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등 종교에 따라서 씨족 단 위로 모여 살면서 갈등과 공존을 번복하며 자신들만의 고유한 전통 문화를 이어나가고 있다. 종교 에 따른 다양한 절기와 규례를 지키고 전승하는 것을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여기는 종교 중심문화 다. 전통적으로 시와 노래를 좋아하며 체념주의, 지역중심, 외부세력에 대한 경계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또한 기본적으로 대가족제도를 유지하고 있으며 여성과 노인은 무시하지만 어머니는 존경 한다. 모슬렘, 힌두교도들은 아들 중심으로 재산을 상속하고 일부 부족들은 딸에게 재산을 상속한 다. 노란색은 악귀를 쫓는 색으로, 녹색은 평화, 붉은색은 승리로 인식하며 여성들은 남성들과 악 수하지 않고, 동성끼리 손을 잡고 다니는 것은 단순한 우정 표시로 이해한다. 모든 음식에는 카레 가 사용되는데, 밥을 먹을 때에는 오른손을 사용하며 적극적으로 사양하지 않으면 계속 먹으라고 권하는 음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외국인에게 친절하고 호감이 있으며 외국인에 대한 동경이 있다. 외국인과 결혼을 하거나 가족 중에 외국인이 있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외국으 로 나가는 것을 선호한다. 3) 종교 BC 5세기 중엽 마가다 왕조의 지배를 받으면서 불교가 전파되었다. 그러나 AD 4세기 굽타왕조가 부라만 교를 국교로 정하여 불교가 일시 쇠퇴하였으나 AD 8세기경 팔라왕조가 들어서면서 불교 가 전 벵골 지역에 퍼지게 되었다. 1204년 회교도의 침입으로 팔라왕조가 멸망하고, 터키계 회교도 들에 의해 지배되어 영국식민통치로 대체될 때까지 회교 지배가 계속되었다. 무갈 왕조의 아크바 르대제는 토지의 사유를 금지하고 왕이 전 토지를 소유하면서 궁정 회교귀족에게 하사하였고 귀 족들은 기존의 카스트제도를 이용하여 토지를 지방호족(힌두교도)에게 세습적으로 관리하게 하 였다. 이에 따라 궁정 회교귀족을 중심으로 이슬람이 번성하고 비회교도에 대한 인두세가 부과되 는 등 차별정책이 시작되자, 카스트 제도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회교로의 개종이 시작되었고 오늘날의 회교국가 되었다. 1988년 5월 공식적으로 이슬람 국가임을 선언한 방글라데시는 이슬람 교도들의 개종을 인정하지 않는다. 특히, 외국인(선교사)의 이슬람교도를 타종교(기독교)로 개종 시키는 어떠한 노력도 인정하지 않는다. 벵골 지역의 개신교 선교는 윌리엄 캐리에 의해 시작되었다. 1947년 200여 년간의 영국 식민지 기 간이 마감되고 전적인 종교적인 이유로 두 개의 새로운 나라로 분리 되었다. 1971년 독립 전쟁이 발발하여 방글라데시라는 새로운 나라로 탄생했으나, 얼마 되지 않아 이슬람 국가임을 선포하고 모든 소수종교들, 즉 힌두교, 불교,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이등국민으로 대우하기 시작했으며 다양 한 사회적, 종교적 압박이 시작되었다. 이 전쟁에서 약 7,000만 명 사람들의 삶이 황폐화되었고 초 기 기독교 교회 지도자들 대부분은 인도에 남거나 동 파키스탄 지역에서 인도로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그 결과 동파키스탄 지역의 기독교 리더십에 큰 공백이 생겨났다. 서방세계의 다양한 지원 이 시작되며 다양한 교리와 원칙을 내세우며 들어온 수많은 외국의 선교단체들은 당시의 현지 기 독교인들과 비(非)기독교인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 시켰다. 서방교회의 많은 재정들이 대규모로 유 입되기 시작했지만 기존 교회 안에는 이러한 지원과 재정들이 효율적으로 사용될 준비가 전혀 되 지 않은 상황이었다. 정규 신학교육을 받은 잘 훈련되고 유능한 교수진들이 자리에 서지 못했고, 다양한 선교단체들은 서로 다른 교회들에서 온 사람들을 동원하여 구제사역을 시작하였다. 그 결 과 기독교 교회의 본질과 영성은 상실되었고 양육된 이들을 서로 빼앗아 차지하는 것이 흔한 일이 되었다. 당시 방글라데시 대부분의 선교단체들은 구제사역등의 사회사업을 교회의 주요 업무로 여긴 이유로 지역교회들에서는 전도와 양육 사역이 차선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교회의 불균형과 교회 내부에서도 불편함을 야기하였고 교회의 연합이나 하나 됨, 형제애와 같은 가치들은 거의 상 실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구제와 사회사업이 점차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면서 교회는 그것을 통제 하지 못하게 되었고 교회는 점차 선교와 전도의 사명을 잃고 하나의 자선기관으로 전락하게 되었 다. 오늘날 방글라데시에는 67개의 기독교 종파가 있다. 가장 큰 조직은 로마 가톨릭으로 전체 기독교 인구의 약 60%를 차지한다. 나머지 40%의 개신교는 66개의 종파로 나누어져 있고 지난 200년 동 안 기독교는 일부 수용적인 힌두교인, 주요 지식인만을 전도하였고 초기선교사들의 사역지이였던 보리샬, 쿨라, 디나즈뿔, 다카, 치타공 등 주요 도시에만 집중되어 있고 북부 꾸리그람을 비롯한 469개의 도청 소재지들과 시골마을들, 그리고 가장 큰 공동체인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려는 시 도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다가 최근에 와서 몇 몇 단체들이 무슬림을 대상으로 하는 다양한 사역들 을 활발히 진행하여 희망적인 결과가 속속들이 나타나고 있다. 4) 사람 ➀ 특징 : 벵골 지역에는 선사시대부터 원주민인 드라비다 족이 살고 있었으나, BC 6세기 경 부터 인도 등지로부터 아리안 족이 침입하여 곳곳에 섞여 정착하기 시작했다. 또한 가까운 티베트, 미얀 마 등지로부터는 터키족, 몽고족 등이 이주해 와 종족간의 혼혈이 이루어진 벵골인들이 주류 사회 를 형성하고 있다. 이 밖에 방글라데시 국경지역에는 지역 간의 고립에 의해 비교적 고유의 혈통을 보존해 오고 있는 약 60개의 소수민족이 살고 있다. 이들은 불교, 힌두교, 기독교 및 무속신앙을 믿 으며 온순하고 사냥이나 농사를 지으며 여성들이 남성보다 많은 일을 하는 모계 중심 사회 등 다양 한 전통문화를 가지고 있다. ➁ 전반적인 성향 :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군중심리에 잘 동요되는 집단주의가 강하고, 정치적으로 예민하며 다혈질이다. 특히 매해 건기에는 여야로 나뉘어져 충돌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나 많은 사 람들이 다치는 등 이로 인한 손실이 막대하다. ③ 찔마리·울리뿔 지역 주민 : 인근 보구라 시와 브라마푸트라 강(힌두교 성지)을 중심으로 가난한 힌두교 사람들이 주류였으나, 동·서 파키스탄 전쟁 당시 재력이 있는 인도 지역의 이슬람교도들이 많이 이주해왔다. 그들은 가난한 이 지역 주민들의 상업, 경제, 토지를 점령했고 지정학적 특성 상 국경의 오지라는 이유로 혜택을 못 받아 장년층 대부분은 정규교육을 못 받은 무학자들이 많다. 찔 마리 지역은 잦은 홍수 피해로 늘 집이 떠내려가고 물에 잠겨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체 념주의가 만연되어있으며 울리뿔 지역은 힌두교 주민이 많고, 나병과 같은 피부질환 환자가 많다. 5) 지역주민의 삶 1948년 이전까지의 방글라데시는 영국에 대한 공업용 원자재 공급원 겸 영국 상품 시장으로서 전 형적인 식민지적 경제구조였다. 19세기부터 홍차와 황마 경작이 확대되었지만 나일론 출시와 서 파키스탄의 차별정책으로 세계 최대 빈곤지역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방글라데시는 전형적인 저개 발농업국가로 전체인구의 약 67%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농업이 국내 총생산 중 35%를 차지 하고 있지만 히말라야의 눈이 녹고 비가 오는 몬순이 겹치면 연례행사인 홍수가 일어난다. 국토의 삼분의 일이 홍수 피해 가능 지역으로 강물이 불어나고 태풍이 불어 벵골 만으로 물이 흘러들어가 는 것을 막게 되면 강들이 범람하여 큰 피해를 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세계 1위의 높은 인구밀 도, 높은 인구증가율(1.78%), 높은 문맹률(67.6%), 낮은 국민자본 축적 및 기술수준의 낙후, 합리적 경제정책을 추진할 정치사회적 기반 취약과 잦은 총파업, 부존자원 빈약 등이 지역민들의 삶을 어 렵게 하는 장애요인들이다. ➀ 수도인 다카는 전국에서 유입된 사람들로 인한 급속한 도시 확장으로 현재 천만 명 이상이 사는 대도시로 시내 중심가 및 외국인들과 부유층의 거주 지역은 국제도시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부유층 주민들의 소득과 교육수준은 높지만, 대책 없이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저임금과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봉제공장과 건설현장에서 일하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으며, 빈민들과 저소득층 거주 지역의 주거 환경은 매우 열악하고 혼잡하다. 국교인 이슬람이 도시 전체를 장악하고 있지만 타 지역에 비해 힌두, 불교, 기독교 등에 개방적이며 다양한 문화와 종교, 인종들이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➁ 찔마리군 : 북서부 국경 지역으로 방글라데시에서 제일 먼저 홍수 피해를 입는 상습홍수 피해지 역으로 20만 명의 인구가 살고 있다. 불과 10km 떨어진 곳에 사는 사람들도 비데시(외국인)이라 부 를 정도로 고립지역 이며, 강한 모슬렘 인구가 많고, 평생 동안 가족단위로 마을을 이루고 살아왔 다. 최근에서야 전기와 통신의 혜택을 받게 되었고, 벼, 황마 농사 등을 하며 살고 있으며 겨울철에 영상 10도 아래로 내려가면 영양실조에 의한 동사자가 생기기도 한다. 전체 면적의 70%가 브라마 푸트라 강에 침식되었고, 강 안쪽으로 27개 섬에 약 2만 여명이 거주한다. 최근 몇 년 사이 도로망 이 좋아지며 왕래하는 폭은 늘었으나, 주민들 대부분이 타지로 나가 본 적이 없는 주민들이 많다. 특히, 섬 여성들 대부분은 출생 후 죽을 때까지 섬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고 강이 자주 범람하여 주 기적으로 이동하며 땅콩, 소를 키우며 삶을 유지하고 있지만 주거, 의료, 교육 환경이 매우 열악하 다. ③ 울리뿔군 : 30만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과거 주산물인 황마의 집산지였다. 타 지역에 비해 가난 한 힌두교도들과 나병환자, 악성 피부질환자가 많고 주 수입원은 농업으로 높은 습도와 강우량이 많다. (3) 주요 선교활동을 시간 순서 또는 사역별로 구분하여 간략하게 소개해 주십시오. 1) 1984~1987 : 벵골어 연구 (다카대학교, 언어학교), 방글라데시 서구선교 현장연구 (지역별, 분야 별, 교단 및 파송국가별, 선교단체 별 중심 사역과 결과 등). 2) 1985~1988 : 방글라데시 신학대학(CCTB), 기독교 제자학교(CDC), 방글라데시 대학생 선교회 (CLB), 방글라데시의 친구(FOB), 방글라데시 M 선교회(MMB)등 방글라데시 선교기관 지원. 다카 연합교회(DUC), 방글라데시 아가페 선교회(AMB), 발루까 수양관 설립. 3) 1987 : 한국방글라데시개발협회(KDAB) 설립.(사역분야, 사역지역 선정) 4) 1988 : KDAB 한국 사무실 및 선교훈련원 개설(한인사역자 및 현지인 사역자 선발과 훈련 시작). 5) 1989~1994 : NGO등록(방글라데시 NGO국), 찔마리와 울리뿔교회, 다카음악학교, 찔마리 병원, 울리뿔 나환자 재활훈련원, 봉제기술학교, 찔마리 유 초등학교, 농군학교 사역시작. 6) 1995~1999 : 사단법인 등록(대한민국 외교부), 북 미주 지부 사무실 개설, 다카, 울리뿔, 찔마리 컴퓨터 훈련원, 다카 새순학교시작. 7) 2000~2010 : 현지 지도력 강화, 찔마리와 울리뿔 중·고등학교 시작, 울리뿔 교회 건축, 농장 등 자 립기반 조성사업 시작. 8) 2011~2015 : 현지인 사역자 KDAB 운영관리 전담, 한인사역자 양육과 말씀사역 집중, 찔마리와 울리뿔 초·중·고등학교 교실 및 강당, 언졸리 자립마을, 병원, 태양열 부화장, 찔마리 교회, 선교관/생활관 건축. - 중점 사역 1) 중점 사역대상 : 찔마리 군 주민 20만 명(섬 주민 2만 명 포함), 울리뿔 군 주민 30만 명(나환자 1,000가정 포함), 방글라데시 기독교 지도자, 신학생, 대학생, 예술인, 다카 시 꼴란 뿔 지역 주민 등. 2) 사역의 중심 가치 : 사람, 지역교회, 자립공동체. 3) 중점 사역 분야 ➀ 증거사역 - 개인전도. 양육, 찔마리, 울리뿔 교회 사역, 모슬렘 및 힌두교인 전도. ➁ 교육사역 - 유. 초. 중. 고등학교 교육을 통한 소통. ③ 의료사역 - 병원, 섬 진료, 이동진료, 공중보건 사역을 통한 봉사. ④ 지역개발사역 - 나환자 재활 훈련, 자립마을, 농촌 지도자훈련, 시범농장, 신용조합 사역을 통한 자립공동체 설립. ⑤ 직업훈련 사역 - 봉제 및 컴퓨터교실을 통한 소통과 지원. ➅ 문화 및 스포츠 사역 - 국제음악학교 & 칼리지, 태권도 아카데미 사역을 통한 소통과 교류. ➆ 장학사역 - 신학생 및 상급학교 진학자 지원. (4)선교사님 사역에 바탕이 된 성경말씀 또는 선교비전, 사명 선언서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1)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거기서 유하다가 거기서 떠나라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눅 9:3~5) 2)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람이 어 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요1서 3:17~18) 3)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 4)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 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고후 3:3) 5)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혹시 저희가 넘어 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 는 화가 있으리라”(전4:9-10) 2. 준비 (1) 성장(선교사로 헌신하기 전까지 살아오신) 과정을 소개해 주십시오. - 감리교목사인 아버지와 교육열이 남다른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성장과정에서 만성 중이염, 급성뇌염, 장티푸스 등을 앓았고 병약했다. 초등학교 1학년 여름에 급성뇌염으로 사 경을 헤매게 되었는데, UMC 파송 서인근 선교사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완쾌 된 고마움을 늘 지 니고 자랐다. 중학교 시절이 되어서 간디, 링컨, 슈바이처 등의 위인을 좋아하게 되었고 아프리카 선교사인 슈바이처처럼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1971년, 대전고등학교 1학년 때 참석한 선교집회에 서 당시 큰 어려움 중에 있는 티벳 사람들을 위한 선교사가 되기로 다짐하게 되면서 책상위에 티벳 지도를 붙여놓고 선교사가 되겠다는 꿈을 키웠다. 그러나 대학 진학과 청년기의 오랜 방황 기간을 거치며 어릴 적 꿈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하나님을 부정하며 예배 때 설교하시는 아버지께 안 계 신 하나님을 전하지 말라며 방해하기도 했고, 자살 소동 벌이는 아들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일 밤 눈물의 철야 기도하시는 부모님 영향으로 1980년 1월 회심하였다. (2)선교사를 꿈꾸게 된 계기 또는 선교사로 부르심(소명) 받은 것에 대하여 소개해 주십시오. 회심한 후에, 한국의 소록도에서 이주한 음성나환자 20여 가정이 충북 청원군 남일면의 한 시골마 을에 정착하여 움막을 짓고, 돼지와 닭 등을 키우며 살고 있는 곳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온 마을 주민들이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지만 건강한 사람들은 들어오기 꺼리는 마 을이라 더 이상의 전도 대상자가 없었고, 새 교우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하나님! 나환자수를 늘 려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한국에 온 방글라데시인 목사가 선교보고 중“세 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는 만성가난, 질병, 재난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고 인구 1,000당 1명이나 되는 나환자들이 있지만 이들을 돌볼 사람과 전도자가 없어 1억이 넘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의 영혼이 죽어가니 전도자를 보내 달라”는 호소가“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는 마게도니야의 환상으로 들려 1983년 5월 방글라데시 선교사로 헌신하였다. (3) 선교사역 준비과정, 특히 언어, 선교관련 교육, 신학적 훈련, 선교비와 생활비(지원) 등을 어떻게 준비하셨나요? 준비과정에서 출석 또는 파송교회로부터 선교와 관련된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소개 해 주십시오. - 대학졸업 후 신학교와 대학원에서 선교관련 분야에 특별한 관심 있었지만 당시에는 선교학과목 과 전공교수가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 선교와 관련된 서적을 읽고, YM·OM·WAC 등 국제선교단체 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을 찾아가 정보를 얻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현지 언어는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후 다카 국립대학교 방글라데시어학과에 입학하여 방글라 디폴로마 과정을 졸업(1987년 6 월)하였다. 동시에 이 기간에 방글라데시 서구 선교 현장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고, 파송교회로부 터는 항공료, 현지정착금, 월 생활비 600불의 지원과 전폭적인 기도후원을 받았다. (4) 선교지역 및 대상, 주요 선교사역 결정 과정 (4-1) 현재의 선교지역을 선정하게 된 배경이나 이유는 무엇입니까? 선교지역을 선정하는 데 영향을 준 인물(또는 사건)을 소개해 주십시오. 1) 찔마리 지역: 방글라데시에서의 첫 번째 사역은, 가난한 교역자들과 신학생들에게 사역비와 장학금을 지원하고 예배당을 건축하는 일이었다. 대부분의 지역교회들이 가정집이나 나무 아래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학생들은 기숙사비가 없어서 신학교에 오지 못하고 파송 받은 교역자들의 기본 생활비를 지역교회들이 부담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가난한 목사 아들로 자란 나에게 이런 방글라데 시 교회의 가난한 현실들은 너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 그래서 현지인 전도자들을 지원하고 예배 처소를 건축하는 일에 열정과 정성을 쏟았다. 이 사역을 시작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매월 지원하는 방글라데시 신학생과 교역자들이 2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신학생 후원과 관리는 신학교를 통해서 할 수 있지만, 전국에 흩어져 있는 교역자들의 생활비는 인편이 아니면 송금할 수 없고 관리도 되 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은 방문하고 다른 한 번은 교역자들이 도시로 나와서 2-3일 동안 함께 지내 며 사역에 대한 간증과 보고를 하고 강의를 듣고, 예배드리며 찬양과 기도로 재충전을 받고 생활비 도 전달해드렸다. 이 모임은 후에 현지인 목회자 연장 교육 프로그램으로 발전하였다. 지금도 그러한 경향이 있지만 한국의 교인들은 선교지에다가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기념 교회와 신학교 건물을 건축하거나 건물 머릿돌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선교지 의 신학교 지원이나 교회당을 헌납하는 일에는 서로 가 나섰다. 당시 미화 5,000불이면 벽돌로 예 배당 건물을 지을 수 있었고, 함석지붕에 대나무를 사용하면 500불이면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 다. 그래서 자체적으로 부지를 마련하면 건축비를 전액을 지원한다고 광고했더니 86곳에서 신청 이 들어왔다. 도시 이외 지역에서는 건축허가가 필요 없는 나라이기에 큰 종이에 건물 모양, 크기, 넓이, 창문, 정문 등을 그리고 건축자재들을 직접 사다 주었다. 그러고는 공사 현장마다 돌아다니 며 감독하여 신청이 들어 온 모든 지역교회들의 예배당을 완공했다. 계속해서 지역교회 건물들이 세워지고, 현지인 교역자들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면서 당장이라도 간판을 걸면 교단을 설립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난한 부족들과 수용적인 힌두마을들에서는 10~20명씩 회심하는 자들이 생겨 났고, 그 때마다 선교사가 직접 가서 세례식을 집례하길 원했다. 하루는, 세 시간을 버스로 가서 한 나절 더 걸어야만 하는 지역교회의 세례식이 있었다. 아침 일찍 숙소에서 출발하여 저녁때가 다 되 어서야 도착했다. 오랜만에 선교사가 왔다고 온 마을사람들이 마중 나와 있었고, 저녁식사로 카레 국물에 통째로 삶은 개구리를 줘서 먹는 시늉만 하였다. 그날 밤, 비가 많이 내렸다. 갈대로 만든 단 칸방에 현지인 교역자들과 함께 누웠지만 물이 스며들어 진흙을 바른 방바닥은 진흙탕이 되었다. 종일토록 걸었고, 제대로 저녁도 못 먹고, 샤워도 못 하고, 잠도 자지도 못했다. 다음 날 아침, 현지 교역자들이 세례 받을 교인들을 교육하고 문답한 후 마을 앞 작은 저수지로 가서 세례를 베풀고 기 념사진을 찍은 뒤, 숙소로 돌아오는 길을 재촉하였다. 방글라데시의 날씨는 연중 5월 말이 가장 덥고 습하다. 이런 날씨 속에서 몇 시간을 계속 걸어 왔는 데도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했다. 현지인 동행자로부터 저기만 돌아가면 버스 정류장이라는 말을 여러 번 들었으나 정작 버스정류장은 나오지 않았다. 날은 푹푹 찌고 지난 밤 부터 먹지도 자지도 못 한 상태로 예배와 세례식을 인도하고 장시간을 걷고 있는데, 마실 물마저 떨어졌다. 당시에는 그 흔한 사이다, 콜라도 구할 수 없어서 플라스틱 통에 식수를 담아서 다녔는데, 식수가 떨어진지 이미 오래였다. 탈수 증상으로 전신이 몽롱해지기 시작하여 잠시 쉴 곳을 찾았다. 올라오던 길에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죽은 소를 뜯어 먹던 곳을 봤었는데 그 근처에 나무 그늘이 보였다. 배가 풍선처럼 부어오른 채 죽어 있던 소가 하루 사이에 앙상한 뼈만 남아 있고, 주변이 음산한 그곳의 나무그늘에 앉아서 겨우 쉴 수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너 지금 뭐하고 있냐?’는 소리가 들 려왔다.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펴봤지만 아무도 없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깨달음 이 왔다. 그리고 계속해서 마음의 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세례 한 현지인들을 네가 전도했냐? 네가 양육했냐? 그런데 세례식을 네가 왜 집례 해? 거꾸로 했어야지? 힘들게 돌아다니며 전도하고 양육 하고 돌보는 일은 네 일이고, 세례 베푸는 일은 현지 교역자의 일이었잖아? 현지인들에게 세례식 을 인도한답시고 그리도 바쁘게 돌아다니고 있지만 힘든 일은 현지인들에게 다 시키고, 정작 너 자 신은 전도도 안 하고, 양육도 안 하고, 자신을 위해서 말씀을 먹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으면서 ……. 가는 곳마다 선교사라고 인사 받고 현지인들이 거둔 결실도 가로채고 있잖아? 도대체 네가 한 게 뭐냐? 현지인과 교역자들을 지원한다고? 지역교회를 건축하고 현지 신학교를 지원하고 건 축한다고? 그래, 그 돈들이 네 돈이냐? 교회 헌금 전달하고 교회 선교비 전달하면서 돈으로 부리고 현지인들을 믿지도 못해서 설계도 직접 하고. 건축자재도 직접 사서 나르고 감독하느라 눈은 형사 눈이 되어서는 자지도 먹지도 않고 돌아다니고 있잖아? 정작 복음이 필요한 1억이 넘는 방글라데 시 모슬렘들과 수천만의 힌두교들에게는 아무것도 안하면서. 복음을 받은 지 200년이 지난 지금까 지 외국원조만 바라는 인구의 0.01%도 안 되는 명목상의 기독교인들 속에 안주하고 쌀과 옷을 받 기 위해 교회에 나오고. 학교, 우물, 병원을 세워주면 세례 받고, 믿는 척하다가 지원 끝나면 다시 돌아가는 부족민들에게 우물 파주고 지어주고 치료한다고 바쁘게 돌아다니고. 생활비 못 받으면 주일예배 인도도 안하는 기존 교회안의 교역자들을 지원하고 훈련한다고 모아서 밥 먹이고 재우 고 강의하고, 전도자 후원이란 명목으로 돈 나눠주는 것을 무슨 큰일이나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정작 복음을 들어야 할 1억 6천만 명의 방글라데시 모슬렘들과 힌두교들을 위해서는 뭘 하고 있느 냐? 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동안 모아 놓고 밥 먹이고, 강의하고, 설교하고, 건물 짓고, 한국교회 견학 시킨다고 돌아다니던 모든 일들을 내려놓겠습니다. 지금까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 고 보니 내가 영적맹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주신 것이다. 정작 나 자신은 전도도 안하고, 말 씀도 안 먹고, 기도도 안하고, 돈으로, 강의로, 설교로, 현지인 교역자들을 동원하여 그저 많이, 크 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교라고 잘못 생각하던 것을 깨닫게 해 주셨다. 나에게 그날 오후, 그 자리는 사울의 눈에 씌운 비늘을 벗겨주신 다메섹 도상이었다. 그날 나는 그 자리에서 그동안 선교라고 믿고, 나의 열심과 나의 감정, 동정으로 일해 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 숙소로 어떻게 돌아왔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숙소에 돌아와서 방글라데시 지도를 다시 펼쳤 다. 몇 개의 도시와 일부 부족 거주지를 제외한 전 지역에 전도자도, 선교사도, 교회도 없는데 기존 방글라데시 교회들 안에만 머물러 있었던 내 자신이 너무나도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그러던 중에 기독교가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북서부 찔마리 지역을 보여 주셨다. 이 지역은 극렬 이슬람주의자 들과 강한 힌두교 지역으로서 매년 반복되는 홍수와 가난으로 방글라데시에서는 고난의 대명사로 불리는 지역이다. 수도 다카에서 불과 430km 떨어진 찔마리까지 이동하는데 꼬박 3일이 걸렸다. 강폭이 10km가 넘는 브라마푸트라 강을 배로 건너고, 직행버스가 없어 구간 마다 로칼 버스를 갈 아타고 버스가 못 들어가는 마지막 십여 킬로미터는 걸어서 찔마리에 도착했다. 처음 보는 찔마리 는 그 어느 곳에도 소망이 보이지 않았다. 인구 20만 명의 군청 소재지라고 하는데, 한 번도 의사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 태반이고 초등학교 교육을 받은 사람은 몇 명뿐이라고 했다. 주민 대부분이 하 루 한 끼로 연명하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찔마리에서의 첫날밤은 을씨년스럽 고 추웠다. 해가 진 후 강가 모래밭에 1인용 천막을 치고 잠을 청했지만 한잠도 이룰 수 없었다. 처 음 보는 외국인과 천막이 신기하였는지 밤새도록 내 천막 주변을 떠나지 않고 웅성거리는 사람들, 각혈하며 기침 하는 폐병환자들, 괴성을 질러대는 정신병자들 때문이었다. 찔마리 첫 사역은 지역 지도자들과 청년들에게 외부세계를 알리고 자신들의 문제를 극복하는 일에 그들 스스로가 나서도 록 격려하며, 경계하는 눈초리로 바라보는 이슬람 주민들과 친분을 쌓아 가는 일이었다. 현지인들 의 반응은 차갑고 공격적이었다. 사역장 부지를 구입하려고 했지만 외국인에게는 땅을 팔려 하지 않았다. 어렵게 구한 토지는 지대가 낮아서 수시로 물에 잠기고 자재를 사다 놓으면 훔쳐갔다. 피 를 빼서 외국에 판다며 환자들을 못 오게 하고, 기독교인으로 만든다며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 았다. 예배드린다고 돌을 던지며 몰려와서 데모하고, 성경을 가르친다는 이유로 돌을 던져 처형하 는 모슬렘식 마을 재판에 선교사들이 끌려가기도 했다. 전기가 없는 지역이라서 덥고 습한 밤낮을 전등과 선풍기 없이 견디기도 했고, 외부와 통신 하려면 1시간 이상 떨어진 곳으로 나가 하루 종일 기다려야 겨우 외부와 연락할 수 있었다. 마을을 지나가면 주민들이 슈코레르 밧자(돼지새끼), 빠 그리(미친년), 빠골(미친놈)이라고 놀렸고, 수렁에 차가 빠져도 아무도 도와주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게 시작된 찔마리 사역이 어느 덧 28년의 시간이 흘렀다. 맨손으로 땅을 파고, 지어 날라 사역장 부지를 높이고 기본 시설들을 세워가며 진행해온 찔마리 사 역은 지역교회, 시범농장, 농군학교, 신용조합, 병원, 유치원·초·중·고등학교, 직업훈련원, 자립마 을 등으로 확장되었다. 기독교 학교라며 자녀들을 보내지 않던 유치원·초·중·고등학교는 지역에서 전국 상위 5% 안의 학생을 배출하는 명문학교가 되었다. 사역장에 전기를 끌어오면서 주변마을에 도 전기가 공급되어 컴퓨터와 인터넷도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지역 청년들과 마을 지도자들을 비 롯한 지방 공무원들이 사역장에 와서 훈련받고, 병원과 이동진료소들에서는 연평균 20,000여명의 주민들이 치료를 받고 있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최고낙후 지역인 찔마리군의 생활지표가 바닥에 서 200계단 상승하였고, 군 내 27개 섬당 월평균 40명이었던 주민 사망률도 자연사 외에는 제로로 떨어졌다고 발표하였다. 무엇보다도 이 지역 출신 모슬렘, 힌두 출신의 개종자들로 두 개의 지역 교회가 세워지고 자립선교를 목표로 진행되어온 이 지역 사역들의 전면에 현지인들이 나서게 된 것을 감사한다. 2) 다카, 울리뿔 지역 방글라데시에서 첫 3년간 사역을 준비하는 동안 사역분야, 사역지 선정의 원칙으로 세운‘현지교회 가 없고 선교사가 들어가지 않은 지역에서 사역한다'‘방글라데시 사람들에게 절실하고 꼭 필요한 사역으로 한다'‘한인 사역자들과 한국교회가 누구보다도 잘 감당할 수 있는 사역으로 한다'는 원칙 에 따라 방글라데시의 문화와 경제 중심인 수도 다카시에 음악학교와 봉제기술 훈련원 사역을, 악 성피부질환과 한센병 환자가 많은 울리뿔군에 한센인 재활훈련원과 교육, 의료, 지역개발 호스텔, 언졸리 자립마을 사역지로 선정하였다. (4-2)평소 선정된 선교지에 대해 가졌던 생각은 무엇이었으며, 어떻게 이해-선교지에 대한 前이해 (pre-understanding)-하였습니까? 외부 세력에 대해 배타적이고 강한 이슬람교와 힌두교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로 기독교 복음을 접하거나 듣지 못하고 방치된 채 가난, 오랜 식민지 통치와 거듭되는 홍수 등의 자연재난, 외부 원 조로 연명해 오는 동안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만성적 의타심과 체념주의 늪 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으며, 다혈질이고 정치적으로 민감하며 일반적으로 외국인에게 친절 하지만 종교, 경제 문제 등으로 이해가 나뉠 때에는 외국인에 대해서도 난폭해지고 거짓말, 뇌물, 각종 부정이 통용되는 사회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 선교사역 준비하는 과정에서 선교지를 직접 방문하거나 선교 대상을 만나 본 적이 있는지? 방글라데시에 온 첫 3년간 현지어 공부, 선교지, 대상 선정 등 구체적으로 사역을 준비하는 동안 현 지인 주거지역에 살면서 매일 일과로 여러 시간씩 시내를 걸으며 사람들을 만나고 편도 3일씩 걸 리는 다카-찔마리를 수십 번 오르내리며 강가 천막, 현지인 집, 군청 게스트 하우스 등에 머물며. 파리가 들끓는 현지 식당에서, 씻지 않은 바나나 잎에 맨밥을 올려주는 현지 음식 매식하며 다양한 선교 대상들과의 교류 하는 시간과 기회 폭넓게 가졌다. (4-3) 선정된 선교지의 주된 선교 대상은 누구(예: 한인교민, 원주민, 상류층, 빈민층, 아동청소년, 장 년층 등)이며, 궁극적인 선교대상과 그 목적을 설명해 주십시오. - 주된 선교 대상 : 1) 지역의 모슬렘, 힌두교들도 중에서 선발되어 KDAB 병원, 학교, 농장, 훈련원, 자립마을 등에서 사역하는 현지인 전임직원들과 사역의 집적 수혜자들인 학생, 훈련생, 환자, 조합원 등. 2) KDAB 사역에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환자가족, 학생가족, 훈련생 가족, 조합원 가족 등의 지역주민. - 그 목적 : 동 사역을 통해서 마음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인 모슬렘, 힌두교 출신 회심자들이 자신들의 지역을 떠나지 않고, 믿음을 지키며,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를 지켜 나갈 수 있도록 격려 하며, 직. 간접 수혜자들인 지역의 모슬렘과 힌두교도들이 복음에 반응하며 마음의 문을 열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5) 파송 과정 : 1983년 5월 방글라데시 선교사로 헌신한 그 주일 저녁, 담임하던 교회로 돌아가 방글라데시에 선 교사로 갈 것을 알리고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지만 소속 교단, 정부 등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 했다. 교단 선교국은 해외선교사 파송에 무관심했고, 당시 감리교단의 감독이던 아버지도 허락하 지 않으셨다. 또한, 외무부 여권과는 신청서를 여섯 차례 반송하며 여권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후 원교회와 여권이 없는 상태에서 방글라데시로 떠날 날짜를 정하고 짐을 싸놓고 동분서주하며 보 냈다. 그러다가 기도원에 들어간 지 사흘째 되는 날, 서울 강남 제일(현, 임마누엘)교회의 연락을 받고 금요일 아침 일찍 상경하여 담임목사를 만났다. 그 다음 날 저녁 후원자들인 선교회원들을 만 난 뒤, 그 주 주일 저녁(1984년 4월 29일)에 파송예배를 드렸다. 여권을 신청한지 일곱 번 만에 6개 월 단수여권을 받아 아내와 3개월 된 아들을 한국에 남겨두고 단신으로 출국하였다. 그리고 태국 방콕에서 1개월 입국비자를 받아 방글라데시에 입국할 수 있었다. (5-1) 파송 교회, 교단 선교부, 선교회 등의 후원 여부, 후원 과정 등을 소개해 주십시오. 아울러 선교 지역 또는 소속 선교부 등이 변경된 경우(가 있다면) 그 이유를 설명해 주십시오. 선교지역이나 교단 선교부가 변경된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교단 선교부의 지원 없었고, 파송교회 의 단독 후원으로 첫 10년 동안 월 600불, 다음 10년간 월 1,000불의 생활비 지원과 기도후원 있었 다. 선교 20년 차 이후에는 선교 이해와 방법 차이로 파송교회 소속 스스로 사임하였고 후원이 정 지 되었다. (5-2) 파송과정에서의 어려움, 즉 비자, 선교비용, 가족과의 관계, 파송교회 또는 선교회 등과의 어려 움은 없으셨는지요? 아내와 나의 결혼반지와 아내가 사준 중고 자동차 팔고, 파송교회의 현지 정착금 3,000불 지원 등 으로 파송 과정에서 선교 비용으로 인한 문제는 없었다. 아내는 평소에 선교사들의 후원자였고 선 천적으로 성격이 낙천적이며 언제나 내 결정을 전적으로 응원해주었다. 부모님과 다른 가족들은 방글라데시에서 몇 달 못 버티고 돌아올 것이라고 믿는 모양인지, 아내와 아들을 두고 혼자서 먼저 간다고 하니 별 반대가 없었다. 파송교회는 교회의 첫 번째 해외 선교사 파송이라는 기쁨에 온 교 회가 진심으로 축복하여 주는 등 여권과 비자 발급 외에는 다른 문제가 없었다. 3. 정착 (1) 선교지역에 입국하는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나거나 또는 어려웠던 점(이 있었다면)을 소개해 주 십시오. 1980년대 초반, 대한민국 여권 발급과 입국 비자를 받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현지 교단 장 초청장 등 여권신청에 필요한 서류를 모두 구비하여 제출했지만 아무런 설명 없이 반송되었다. 서류상 하자를 찾을 수 없어 똑같은 서류를 다시 제출하고 반송 당하기 일곱 번째 되던 날, 외무부 의 여권과 담당자에게 불려가서 논쟁하던 일이 있었다. 중동 공관에서 일하다가 본국 여권과로 돌 아 온지 며칠 안 되었다고 자신을 소개하며, 전임자가 내 서류를 다섯 차례 반송한 기록이 있는 서 류인데 다시 들어와서 반송하였다고 했다. 그랬더니 다음 날 똑같은 서류가 다시 제출되어 불렀다 며 날 세워둔 채로 자신은 의자에 앉아서 고압적인 자세로 말했던 기억이 난다. “관공서 상대로 장 난하는가? 국익에 위배되게 이슬람 국가로 왜 가려하는가? 혹 여권을 받아 미국 등 다른 나라로 가 려는 것 아닌가?”등 거침없는 말을 쏟아 냈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당신이 외교관 맞는가? 무엇이 외교이고 무엇이 국익인가? 우리나라 국교가 불교라면 조계종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외교고, 대한 민국의 발전의 뿌리에 기독교가 있다면 기독교 복음을 가지고 나가는 것이 외교이며 국익을 위하 는 것이 아닌가? 박 정희 정부가 서울 한복판에 대형 모스크 허락한 것은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외 교적 판단 때문이 아니었나?”라고 반박하였다. 이에 할 말을 잃은 그는“오래 있지 말고 빨리 다녀 오세요.”라고 하면서 6개월짜리 단수여권을 내주었다. 6개월짜리 단수 여권으로 태국 방콕에 도착 하여 방글라데시 대사관에 비자 신청하고 15일간 기다리는 우여곡절 끝에 한 달 입국비자를 받아 방글라데시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즉시 다카 국립대학교 벵골어학과에 입학하여 비자 연장을 했지만 6개월짜리 단수 여권을 장기 복수 여권으로 바꾸기 위해 한국외무부 여권과 직원과 비슷한 성향의 한국대사관 영사과 직원을 설득하느라 애태워야만 했다. (2) 현지에 도착하여 한국 대사관, 한인 교민회, 다른 선교사로부터 도움을 받으신 것이 있으셨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처음에 도착해서 2년간은 한인들과는 거의 교류 없이 지냈다. 당시 한인사회는 공관원을 포함해 서 전체가 100명이 안되던 때였는데, 소수의 한인들이 주일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지만 설교자 가 없어서 녹음테이프로 설교 들으며 예배드리고 잇었고 주일 하루 만이라도 자신들의 교회를 섬 겨달라는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서 담임목사가 올 때까지 만이라는 전제 하에 지금의 다카한인교 회를 2년간 섬기는 동안 KDAB를 구상하며 준비하는 일에 동안 많은 도움을 교민들로부터 받았다. 그중에서도 당시 한인교회 집사 서 건이 대사(당시 참사관)와 정 용성 집사는 KDAB창립 멤버로 들어와 한국 새마을운동 관련 등 많은 자료를 공급해주었고, 사역을 막 시작할 즈음에 서구선교사 들을 추방하는 등 방글라데시의 이슬람 국교 선언으로 혼란스러운 와중에 주재국에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홍보해줘서 KDAB가 방글라데시 최초 한국 NGO로 허가 받을 수 있었다. 2. 현지 도착 후 방글라데시 언어를 배우고 서구 선교 현장을 연구하며, 방글라데시 선교 1세대로 35-40년씩 선교하고 1986~7년 사이에 은퇴하는 노선교사들을 찾아다녔다. 출신국가, 교단, 소속 선교회는 다르지만 바턴을 이어갈 다음 주자로 여겨초임 선교사를 위한 조언을 해달라고 간청하 였다. 동양에서 온 낮선 초임 선교사에게 자신이 가장 중요시 여긴 평생의 중점 사역을 아낌없이 전수해준 고마운 선교사들이 있었다. 1) 뉴질랜드 침례교선교부 파송‘에버리목사’: 그는 방글라데시 BBS 교단의 수많은 사역들을 확장시켰고, 은퇴 후 본국에 돌아가서 고향 교회를 섬기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다카의 외국인들을 위한 다카국제교회(DIC)의 담임목사로 몇 년간을 더 목회하다 은퇴하였다. 에버리가 방글라데시에서 40년 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일은‘엘리 야스’라는 모슬렘 청년 한 명을 전도하여 양육시킨 일이라고 했다.‘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 분이 구세주다’ 는 말이 적힌 전도지를 보고, 이런 것을 만들어 돌리는 사람들을 처형하겠다고 찾 아 온 청년 엘리야스를 전도했고, 훗날 이 청년은 그 부모에 의해서 납치돼 온갖 회유, 감금, 죽창으 로 찌르는 고문을 당하다가 독살 직전 그 어머니의 도움으로 겨우 도망쳐 평생 동안 모슬렘들과 힌 두교들에게 벵골어 성경과 전도지를 보급하였다. “나의 40년 방글라데시 선교사역의 열매는 ‘엘리 야스’형제 한 사람입니다”라며 환하게 웃으며..., 사역을 막 시작하는 나에게‘한 사람에 집중하세 요. ’ 라고 말했다. 2) 미국 하나님의 성회 파송선교사‘월슨목사’: 그는 방글라데시에 와서 첫 15년간 Every Contact Home이란 NGO를 만들어 가난한 가정들이 대나 무 바구니, 수예품 등을 만들어 팔게 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을 돕는 일에 전념하였다. 그 후 15년간 연극배우인‘스미스 어디까리’란 청년과 모슬렘에서 천주교로 개종해 있던 파카스탄 출신 '아샤케 인' 등 두 명의 현지인을 전도 양육하는 데에 전념하였다. 또한 은퇴할 때까지 남은 10년 동안 이 두 현지인 전도자들의 영적교사가 되어 오늘날 방글라데시의 최대교회를 이루고, 전국에 수많은 지 역 교회들과 신학교, 일반학교 등을 섬기는 다카 AG 교회의 두 명의 현지인 목회자들을 키우고 후 원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방글라데시를 떠날 때까지 오후가 되면 어김없이 전도지를 들고 노방전 도를 하면서 “나의 40년 선교는 두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3) 미국 북침례회 파송의료선교사‘월슨’ : 40년이 넘도록 부족 전도, 의료선교, 문서선교로 섬긴 월슨 선교사는 주변 모슬렘들의 끊임없는 테 러 공격을 감내하며 당시 다카에서 항구도시인 치타공까지 10 이간이 넘게 걸리고 다시 산속으로 5시간 이상 걸리는 오지 사역장과 방글라데시 수도 중앙정부 사무실을 수 없이 오르내리며 설립한 마룸갓 병원을 통한 의료사역과 치타공지역 소수 부족들을 위한 성경번역과 문서사역 등 그의 평 생 사역과 팀 사역 노하우를 가르쳐 주었다. 4) 미국 장로교 파송 의료선교사 ‘카딩턴’: 주한 의료선교사로 1949년부터 1978년까지 한국에서 결핵사업과 광주기독병원 설립 등 활발한 의 료사역을 하다가 1979년 방글라데시로 건너와서 2006년까지 의료선교사로 섬기다가 피부암으로 별세 한 카딩턴은 우리 부부에게 그 누구보다 더 친절하게 현지사역을 안내하고 현지교회 지도자 들 소개해 주었으며, 간호사인 아내가 병원사역을 할 수 있도록 직접 도와주었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구제하고, 섬기고, 치료하며, 전도하는 선교사의 삶을 몸으로 가르쳐 주었다. (3) 현지에 도착하여 현지인, 선교 대상들과 어떻게 접촉하였으며, 이후 어떻게 관계를 형성하셨는 지 그 과정을 설명해 주십시오. 처음 방글라데시 북부 찔마리로 올라가는 길에 꾸리그람 도지사 집을 방문하였다. 찔마리로 들어 가기 원하는 이유를 알리고 협조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소개로 찔마리 민선 군수 등 지역 관 리들 접촉할 수 있었고, 그 후 수도 다카와 찔마리를 수십 차례 오르내리며 지역 주민들에게 절실 한 이동진료, 수혜복구사업 등에 적극 참여하며 지역민들과 폭넓게 접촉하였다. 찔마리 군수에게 한국의 새마을지도자 훈련을 주선하였고, 생전 처음으로 해외연수 받고 돌아 온 찔마리 군수 쇼꼴 알리씨는 우리의 나팔수를 자청하고 나섰고, 이 지역 출신 중앙정부 고위관리는 자신의 토지 5만 평을 무상 제공하였지만 정치적 중립과 지배층의 지원을 받는다는 인식을 지역민들에게 주지 않 기 위해 그들의 친절과 호의를 어렵게 거절하였다. 또한 어떤 이권 개입이나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이동진료로 시작된 의료 사역과 섬 진료, 그리고 몇몇 주변 아이들을 모아 시작된 초등학교, 한국 의 새마을 운동을 소개하며 지역 청년들을 모아 시작된 찔마리 가나안농군학교 등을 통하여 지역 의 이슬람, 힌두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접촉하기 시작했다. 다카 지역 역시 89년 개교한 다카음악학 교, 봉제기술학교 등을 통하여 접촉하는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며 소통해 나갔다. (4) 현지에서 선교 사역의 동역자가 있으셨다면, 그 만남의 계기, 지원 또는 협력과정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다카에서 도착해서 다카시내에 월세로 숙소를 얻었는데, 집 뒤에 윌리암케리 기념교회가 있었고 기독교인들 비교적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했다. 그래서 주변에 현지교회 지도자들이 가까이 살고 있어 나의 숙소에서의 기도모임 초청에 응한 방글라데시 성서공회 총무 엘리야스, 다카 임마 누엘교회목사로 후에 CCTB학장이 된 사이몬, CLB 디랙터 스티븐, 첫 3년간 나의 서구선교 현장 연구 전임조력가인 문치씨 등이 현지인 동역자들이다. 스티븐과 싸이몬 쏘르까르 목사는 교회개 척, 교역자 및 신학생 지원 사역을 도왔고, 엘리야스의 후임으로 성서공회 총무가 된 몬돌은 1988 년에 시작한 방글라데시 발루까 기도원, 다카연합교회와 목회자 훈련원 사역을 위한 아가페선교 회 사역 등을 도왔다. 그리고 당시 다카한인교회의 서건이, 정용성집사와, 1986-7년 사이 방글라데 시에 도착한 의료선교사 강원희장로, 한방친선협회 간호사 장성희 선생 등 네 사람과 우리부부는 출신, 교파가 다르지만 매일 만나서 방글라데시 선교에 관한 정보를 나눴다. 그러던 중 1987년 5월 강원희, 장성희선생이 현지어 3개월 과정 끝낸 것을 축하하기 위해 함께 간 남부해안 콕스바자에 서 KDAB 전신인 가칭 방글라데시선교회(KMB)라는 이름으로 연합선교회 설립을 결의하였다. (5) 선교지 현지의 공식 언어와 선교 대상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무엇입니까? 선교 현지 언 어를 습득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습니까? 선교대상과의 소통을 도와주는 언어 조력자의 유무, 언어교사 또는 언어 학교 등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벵골어.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다카대학교 벵골어학과에 입학하여 3년간 방글라 디폴로마 과정을 마쳤다. 하지만 잦은 데모와 종교 명절 등으로 수업을 안 하는 날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당시 서구 선교단체들이 연합으로 만든 현지 NGO 단체인 HEED가 운영하는 언어학교에도 등록하여 벵골어 를 공부했다. 처음에는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이 어려워서 현지인 개인교사의 도움을 받았고, 현지 어 성경, 신문 읽기를 계속하였다. (6) 정착 및 생활 (6-1) 현지 생활에 관한 준비 및 적응(숙소, 생활비, 생활용품 등) 과정을 소개해 주십시오. 환경의 차 이를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설명해 주십시오. 파송 당시 태어난 지 6개월 된 아들이 있었고, 현지정보, 숙소, 생활용품 등 준비 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단신으로 입국했기 때문에 생활용품 등 한국에서 가져 간 것 없었다. 날 위해서는 그저 몸 하 나만 누울 수 있는 침대와 그릇 몇 개면 충분했고, 식사는 라면이나 맨밥에 매운 고추 한 개 또는 현 지식당에서 매식하였고 불편하지 않았다. 6개월 후 아들과 아내가 올 때는, 당시 방글라데시를 떠나는 한인들이 사용하다가 싸게 파는 것 들 중에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마련했다. 숙소는 외국인 거주지에서 떨어진 현지인 주거 지역에 월 세로 얻었다. 집주인인 모슬렘 3 형제가 각자의 부인 2 명 사이에서 출생한 여러 명의 자녀들과 함 께 사는 건물 아래층이었고 그들은 외국인이 자신의 집에 세 들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늘 친절하게 대해주어서 처음 적응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 없었다. (6-2) 자녀 교육은 어떠게 하셨습니까? 첫째 아들은 1살에 방글라데시에 왔고, 둘째와 막내는 방글라데시에서 태어났다. 방글라데시에서 자녀 교육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방글라데시의 학교들은 이슬람 교육 을 시키고, 다카의 외국인 학교는 비싼 학비를 감당 할 형편도 안 되지만 보낼 마음도 없었다. 자녀 들을 등·하교 시킬 수도 없어서 서양 선교사 부인 몇몇이 10살 미만의 자녀들을 가르치기 위해 시 작한 모하마뿔의 작은 학교 옆으로 이사했다. 전교생이 30여명인 이 학교에서 10살까지 공부하게 했고, 10살 이후에는 같은 문화권인 인도 남부의 코다이카날 국제학교(KDIS)에서 중·고등학교 과 정에서 공부시켰다. 처음 인도의 학교로 보낼 때 KDIS교장에게 간단한 내 소개와 아들 맡길 학교 를 찾고 있는데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 편지를 보냈다. 몇 줄 안 되는 황당한 편지였을 텐데, 자신 도 MK이고 인도선교사 자녀로 자라 본국인 미국대학에서 교육학 전공하고 인도로 돌아와 교장으 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과 같은 친구 두 명이 있는데 한명은 교목이고 다른 한명은 교사라고 했다. 그의 답장에 무조건 당신 학교로 보낼 것이니 받아달라고 부탁하였다. 장학금을 주는 등 특 별 배려로 첫째는 인도에서 중·고교 과정을 마치고 미국 일리노이 주립대와 웨슬리신학대학원 거 처 샌디이고 UMC EM 목사로 사역하고 있고, 둘째 역시 같은 과정을 거쳐 시카고에서 고등학교 교 사를 하고 있으며, 막내딸은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다. (6-3) 사모님의 역할은 무엇이었으며, 사모님과의 관계는 어떠셨는지요? 아내는 방글라데시에 도착한 후 어린 자녀들을 돌보는 일과 벵골어 공부, 자녀들이 유치원에 들어 간 이후에는 간호사로 현지 선교병원에서 봉사하였고, KDAB사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부터는 한인선교사들의 벵골어 교육 등의 사역을 18년간 섬겼다. 2002년 이후에는 10살부터 부모를 떠나 생활하며 외로운 사춘기를 보낸 세 자녀들의 학업 뒷바라지와 선교회 지부사무실 업무관리, 생활 비 마련과 남편을 후원하기 위해 병원, 가정방문 간호센터 등에서 일하는 등 1인 3역을 감당하고 있다. 아내는 긍정적이고 단순하고 명랑한 성격이어서 선교일이나 가정일로 갈등하거나 의견 충 돌한 기억이 없다. 2002년 이후 긴 시간을 기러기 부부로 지내고 있지만 피차에 전적으로 신뢰하며 지내는 것 늘 감사하다. (6-4) 현지에서의 건강관리(풍토병, 질병 등) 또는 극복 비법이나 사례들(이 있으면) 소개해 주십시 오. 처음 방글라데시에 도착하면서 30세에서 50세의 인생 중간부인 20년간 건강을 책임져 주실 것을 기도했다. 어려서부터 만성중이염과 편도선염 등의 질병은 있었지만 방글라데시에 온 20년간 특 별히 아픈 적이 없었다. 그러나 만 50세부터 고혈압, 폐렴, 세 차례의 뎅기열, 중이염, 치주염, 골절 상, 대형 교통사고로 인한 허리부상 등 크고 작은 질병으로 고생하였다. 건강관리를 위한 특별한 비법은 없지만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큐티, 소속 사역자들과의 아침예배 후 집단 체조로 시작하고 주 6일 동안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업무에 충실한 후 종례 기도모임으로 하루 일과를 마치는 규칙적인 생활을 처음부터 오늘까지 30여 년간 지속하고 있다. 그리고 늘 카메라를 곁에 두고 주민 들의 얼굴, 동·식물, 풍경 사진을 촬영하는 등 사역과 관련된 취미 생활로 정서관리를 한다. 사역 특성상 여러 사역장을 순회하며 사역을 하다 보니 여러 개의 사무실과 책상을 사용하며 늘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는 기분이 이어서 지난 32년간 지루하다는 느낌이 없었다. (6-5)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어려움-해결해야 할 과제, 고민 등-은 무엇이었습니까? 1) 다행히 현지 문화와 종교에 대한 문화 충격으로 인한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본국 교회와 지 도자들에 대한 역 문화 충격으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영적,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여 행 중 한국을 경유할 때에도 입국하지 않고 인천 공항 안에서 22시간 동안 대기하는 등 가능한 한 국방문을 기피하였다. 2) 그렇게도 닮고 싶지 않았던 한국교회 일부 지도자들과 CEO 들의 독재성과 카리스마가 나에게 도 똑같이 있는데, 이것을 버리고 부드러움을 소유하는 일과 일중독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3) 사역의 운영권을 이양했어도 여전히 모든 것을 의존하려하는 현지인들의 만성적 의타심 지우 고, KDAB 설립자라는 나의 이미지와 기억을 지우는 일이다. (7) 선교지 정착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부딪히면서 겪은 어려움을 소개해 주십시오. 또 이 과정에서 특별히 기억나는 것이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1) 처음 1년간, 비자와 노동허가가 없어서 은행구좌를 개설하지 못하여 송금을 받지 못했다. 정착 금으로 가져온 3,000불로 장기 월세를 계약하고 6개월 분 집세를 보증금으로 내고 가구 등 생필품 몇 개 구입한 후, 몇 달을 살고 나니 남은 것이 없었다.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어린 아들에게 먹일 것 이 없어 한 여선교사가 두고 간 짐 속에 있던 파랗게 곰팡이가 핀 마른국수를 빨고 또 빨고 말려서 아이만 먹이며, 주위의 한인들과 선교사, 본국 가족이나 후원교회에 알리거나 꾸지 않고 금식기도 하는 심정으로 버텼다. 그 당시 15Kg 이상 살이 빠졌다. 2) 현지 도착하자마자 둘째를 임신한 아내가 입덧하며 요리책 보면서 혼자 눈물을 흘리는데, 아내 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럴 때마다 아내와 함께 집 밖으로 나가 길에서 태어나고 살 다가 죽는, 수많은 도시 빈민들이 누워 자는 다카 시내의 밤거리를 걷다 들어오곤 했다. 3) 처음 다카대학교 학생 비자기간이 끝나고 단체설립을 준비하는 동안, 비자를 연장하기 위해 3 개월에 한 번씩 국경을 넘어갔다가 와야 했었다. 어떤 때에는 정신없이 지내다가 비자 기간이 끝난 것을 당일에 발견하고는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부랴부랴 가방 하나에는 여름 옷, 다른 하나에는 겨울 옷가지를 담아 무작정 공항으로 가서 방글라데시에서 제일 가까운 나라들 중 더운 인도 콜카 타나 추운 네팔의 카투만두 중에서 좌석이 구해지는 곳으로 오가며 비자 연장위해서 가슴 조리던 기억이 생생하다. 4) KDAB 사역을 막 시작 했을 때, 매일 아침 성경 읽고 기도한다고 주민들이 몰려와 돌을 던지며 항의하던 일. 외국인 소유나 외국 단체의 돈과 물건은 훔쳐도 된다고 인식하는 듯 이러한 일에 지 역 주민들이 서로 협력하고 용인하여 집을 지으려고 자재를 사다놓으면 밤새 다 가져가고 심지어 는 공사용 모래까지 퍼가는 도둑을 경비가 잡아 아침까지 가둬 두었다고 주민들은 데모하였고 이 사건을 이유로 선교사들이 끌려가 이슬람식 마을 재판을 받았던 적이 있었다. (8) 선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생각했던 선교지에 대한 인식이 선교지에서 현지체험을 한 후 달라진 것 또는 사역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현지에 대한 인식이 바뀐 사례가 있었는지요? 있었다면 그 이유 는 무엇입니까? 1) 처음 몇 년간 방글라데시의 교회들을 지원하고 가난한 교역자, 신학생, 교인들을 돕는 일이 최 우선이라 생각하여 현지교회 건축, 교역자 및 신학생을 지원하는 일에 집중했었다. 그러나 현지 교 회 안에 들어가 보니 원조만 바라고 설교, 예배도 먹고 살기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듯 했다. 교회 안 에 교제만 있고 말씀, 헌신, 전도, 헌금 생활도 없었다.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기존 교회를 돕는 일에 는 관심을 갖지만 모슬렘들에게 전도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랜 서방교회의 원조를 받아온 현지 목회자들은, 월급이 늦어지면 그 주일 설교를 하지 않았다. 교인들은, 구호물자를 받기 위해 한 가족이 서로 다른 교단의 교회에 등록하였다. 한 교회에서 구호물자를 나눠주면 가족 전체의 구 호품을 받고, 또 다른 가족이 등록한 교회에서 다시 가족 수 만큼의 구호품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2) 모슬렘들보다 현지인 기독교인들을 믿을 수 있다고 여겨 선교부 내의 재정관리 등 중요 업무는 모두 기독교인들에게 맡겼다. 그러나 빈번히 재정사고를 내고 몸으로 하는 일을 싫어하고, 불평하 는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현지인들이었다. 모슬렘 국가의 선교회들과 선교사들이 소수의 기독교인들만 고용하는 것 자체가 불공평하고 전체 인구의 85% 이상 차지하 는 모슬렘들과 같이 생활하고 사역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어찌 그들과 소통하고 전도의 기회가 있 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후 현지교회 목회자를 제외한 학교, 병원, 훈련원, 농장 등의 전 체 사역장의 전임직원 대부분을 모슬렘, 힌두교도들 중에서 영입하여 현재 102명의 현지인 전임사 역자들의 종교 분포가 모슬렘 80%, 힌두 12%, 기독교 신·구교를 포함하여 8%이다. 3) 처음에는 국제선교회들과 기독교 NGO 단체들은 자신들의 사역을 발전시켜 나가면서 현지교회 들을 지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현지교회를 돕기 원한다면 재력과 능력을 갖춘 선교회들과 기독교 NGO들 스스로가 현지교회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독립 전 방글라데시 지역에 는 비록 적은 수였지만 현지인 기독교인들과 지역교회들이 있었고, 훈련된 목회자들이 있어서 서 방세계의 다양한 구제활동들도 현지 교회들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그러나 독립 전쟁의 참상과 이 지역의 대형 자연재난과 기근이 세계의 주목을 받으면서 수많은 서방선교단체들과 기독교 NGO 들이 앞 다투어 진출하게 되면서 지역교회가 주관하던 사회사업과 구제사역들이 조직과 능력을 갖춘 선교단체들과 NGO들에 넘어갔다. 현지교회 지도자들도 월급이 많은 서방 NGO로 옮겨가면 서 지역 교회는 목회자도 없어지고 선교사들도 NGO로 가고 교회 일에 자발적이던 청년들도 앞 다 투어 NGO로 자리를 옮겨 서구 선교단체들과 기독교 NGO 활동이 확장될수록 지역 교회는 점점 더 쇠약해져 갔다. 지역교회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만성적 의타심의 늪에 빠지게 되었고 수많은 선교사들과 선교비가 투자되었지만 현지 교회는 오히려 더 연약해지고, 영적 기갈과 Mission = Money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