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존재로 쓰임 받음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주라, 구제하라." 신명기 15:14
선교지에 다닐 때마다 현지인들의 빈곤을 내 온 몸으로 접하게 된다. 이번에도 "키토"가 에콰도르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동네에서 아이들이 쓰레기를 뒤지는 것을 보고 마음이 아팠다. 몇 년 전에 간 케냐의 투가나 사막에는 오로지 사막과 가시 나무와 했빛만 있을 뿐,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 사람들이 피골이 상접한 영양실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동물처럼 비참하게 사는 것을 보고 깊은 회의에 빠진 적이 있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다이어트가 필요한 정도로 음식이 넘쳐 흐르는데 이디오피아나 방글라데시같이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그 속에서 태어났다는 것 만으로 저처럼 절대 빈곤의 가난으로 굶주려야 하나? 어찌하여 이 세상은 이 처럼 불공평한 것일까?
학자들이 아프리카는 인류의 영원한 수수께기라고 하지만,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답을 찿았다. 신명기 15장 11절에서,"땅에는 언제든지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 지구 상에 가난한 자들이 언제나 있겠다고 하시며 우리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아낌없이 도와주라고 명령하신다. 아프리카의 가난한 나라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사랑을 베풀어 줄 상대가 되어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모두 다 부유하게 잘 살면 도와줄 상대가 없지 않은가? 모두 다 부유하다면 인간은 타락할 것임에 틀림없다. 나라와 나라 간에, 개인과 개인 간에 잘 살고 못 사는 차이가 있는 것을 도움주는 존재로, 도움 받는 존재로 쓰임받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나님께서 가난한 사람은 도움을 받는 존재로, 부한 사람은 도움을 주는 존재로 쓰시는 것 같다. 신명기 15:14 에사 다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대로 주라, 구제하라."라고 명령하신다. 그것도 모르고, 복 받아 잘 살게 될 때 나와 내 식구 만 잘 먹고, 잘 쓰고, 잘 사는 것은 분명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삶이다.
신명기 15:9 은 더 무서운 말씀이다. "네 궁핍한 형제에게 악한 눈을 들고 아무 것도 주지 아니하면 그가 너를 여호와께 호소하리니 네가 죄를 얻을 것이라." 손을 펴서 남을 돕지 않으면 죄를 얻는다고 하신다. 반면의 신명기 15:10에서 우리가 가난한 사람에게 넉넉히 주고 구제할 때 우리에게 넘치는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6.25 사변 때, 우리는 절대 극빈으로 가난해서 미국 사람들의 도움을 받는 존재로 쓰임을 받았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나라가 부유해져서 경제 강국으로 손꼽히게 되었고, 세계에서 두번 째로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는 나라가 되었다. 단 땅끝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기회로 삼는다. 또한 기쁜 마음으로 선교지의교회 개척을 위해 헌금도 하면서 여러모로 주는 존재로 쓰시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민감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제 주는 존재로 사용하심에 겸손하게 순종해야겠다. 물질을 구는 구제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은 죄사함과 영생의 복음을 함께 전해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인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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